본격적인 일본유흥의 탐험에 앞서 일본 성문화의 성지, 요시와라라는 곳의 역사 이야기부터 잠깐 해 봅시다. 요시와라는 도쿄 아사쿠사 근처에 있는 소프랜드가 잔뜩 모여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일본 밤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지명이죠. 하지만 이 지역을 그냥 단순한 홍등가의 한 구석쯤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노노.

왜냐하면 이곳은 그 옛날 에도 시대, 일본 남자들이 로망을 불태웠던 곳이거든요. 그리고 현대 일본 성산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프랜드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프랜드는 우리나라의 안마시술소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입니다. 설마 안마시술소가 안마를 시술하는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진 않으시겠죠? 하긴 안마시술소에 갔다가 걸렸던 몇몇 연예인들이 그런 소리를 하긴 했었죠. “안마 시술소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선 안마만 받았어요.”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소프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길 무슨 빨래방이나 코인세탁소 쯤으로 상상한다면 곤란하죠. 비누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게 세탁용은 절대 아니니까요.
요시와라 개장! 도쿠가와 쇼군도 OK한 유곽
1617년, 도쿠가와 막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자들의 성욕을 풀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안정된다.“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에도의 남녀성비는 완전 미친 상태였거든요. 도쿠가와 막부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수도로 정했을 때 그곳은 그냥 허허벌판이었습니다. 때문에 수도건설을 위한 토목공사가 많았고 일자리를 찾아 엄청난 수의 남자들이 에도로 몰려들게 됩니다. 덕분에 에도의 남녀성비는 그냥 곱창이 나버리죠. 보통이 7대1, 심할 때는 10대1까지 벌어졌으니까요. 에도 남자 중 열에 아홉은 연애와 섹스 전선에서 물을 먹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스웨덴인지 덴마크인지 북유럽 어느 나라에서 섹스를 못하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장애로 인정해서 모태솔로들에게 사회복지 차원에서 성매매 쿠폰을 나눠준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의 에도가 딱 그런 사회복지가 필요했던 시점이었어죠. 남자들의 성욕을 제대로 풀어주지 않았다가는 어떤 사회적 혼란이 일어날지 윗대가리 어르신들도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만든 게 바로 요시와라였습니다.

요시와라는 처음에 니혼바시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657년 대화재로 홀라당 타버리고 지금의 아사쿠사 쪽으로 옮겨오면서 “신 요시와라”라는 이름으로 거대 유곽이 탄생하는데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청량리나 미아리같은 거대 집창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크고 세련되었었죠. 도쿄 여행가서 아사쿠사에 가 본 사람들은 그곳에 센소지라는 큰 절이 있고 그 앞에 거대한 상점가가 늘어서 있는 걸 본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뒤에 그런 거대한 성매매 단지가 있다는 건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에도 시대에도 아사쿠사는 묘한 동네였습니다. 센소지 바로 뒷쪽에 요시와라 유곽이 있었으니 성스러움과 또 다른 성스러움이 겹쳐지는 기묘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게 바로 아사쿠사의 본모습이었어요. 상점가에서 술 마시고 절에 가서 복을 빌고 그다음엔 요시와라에 가서 성욕을 풀 수 있었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원샷으로 해결되는 거대한 종합엔터테인먼트 테마 파크가 아사쿠사라는 동네가 만들어진 이유였습니다.
꽃처럼 피어난 오이란, 그리고 에도의 하이엔드
요시와라에서 일하는 언냐들을 유녀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단순한 성매매 여성이 아니었어요. 에도의 남자들에게 그녀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아이돌 같은 존재였었죠. 프랑스의 물랑루즈 캬바레의 매춘부들이 당시 예술가들의 뮤즈였듯이 요시와라의 유녀들 역시 그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유녀들 중에 인기녀들은 ‘오이란(花魁)’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뭐 거의 슈퍼스타였다고 보면 됩니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세팅에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거창한 머리 장식을 하고 얼굴 몸매 섹스는 물론 예술·시·춤 등등에 다 능했다니까 말 그대로 토탈 패키지 엔터테이너라고 말 할 수가 있죠. 걸그룹으로 치면 센터쯤 되는 존재들이라고나 할까요? 그것도 비주얼 담당, 메이보컬, 매인댄서가 다 되는.

오이란은 돈이 있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예약전쟁의 광클은 기본이고 적어도 3번은 만나야 옷을 벗길 수 있었다고 하니 오이란을 향한 남자들의 열망은 정말 대단했겠죠. 오이란의 속옷을 벗기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처음 얼굴 한번 보는데 5-10냥의 돈이 들어가고 두번째 가서 조금 친해지고 옷 한번 벗기는데 50냥이 들어가고 세번째 가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데 100냥의 돈이 들어갔다고 하거든요. 에도시대 물가로 쌀 150kg가 1냥이었다고 하니 오이란을 지명 삼아 맘대로 데리고 노는 레벨까지 가려면 쌀을 무려 24톤을 써야 한다는 견적이 나옵니다. 이건 보통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어지간한 재력과 권력이 있는 남자가 아니면 이렇게 놀기 힘들거든요.

물론 요시와라에 비싼 오이란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가성비 좋은 중급의 유녀도 있었고 저렴하게 섹스를 할 수 있는 하급 유녀들도 있었죠. 하지만 아무리 저렴한 C급 유녀라도 화대는 최소 1냥 정도 했습니다. 한번 자빠뜨리는데 최소 쌀 150kg가 필요했다는 얘기니 요시와 자체가 에도 밤유흥의 하이엔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카부키, 하이쿠, 우키요에 같은 일본 대중문화가 폭발했는데요 최근 NHK에서 방송하고 있는 <베라보>라는 대하드라마에 이런 모습을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배경이 요시와라입니다. 여기서 오이란들의 화보집을 팔아서 큰 돈을 번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남자의 이름이 츠타야 쥬자부로입니다. 츠타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죠? 맞습니다. 일본 시내 곳곳에 있는 서점, 예전엔 CD, DVD 렌탈로 유명했던 츠타야가 바로 츠타야 쥬자부로의 이름에서 따온 겁니다.

물론 츠타야가 쥬자부로가 창업한 회사인 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츠타야는 1983년 오사카에서 창립되었어요. 쥬자부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죠. 대신 책과 미디어를 다루는 일을 주업종으로 하는 만큼 에도시대의 출판왕, 미디어왕이었던 츠타야 쥬자부로에서 그 이름을 따왔던 거죠. 실제로 츠타야가 서점으로 성공하고 이후에 미디어 시장도 석권했으니 이름빨 하나는 제대로 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화재 + 지진 + 전쟁 = 요시와라 멘붕
이렇게 잘나가던 요시와라지만 그 번영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단 지겹도록 불이 많이 났어요. 사실 이건 요시와라의 뿐만 아니라 에도 전체가 겪었던 문제입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목조가옥에 엄청난 인구가 모여 살다 보니 걸핏하면 화재가 일어났거든요. 요시와라도 무려 열여덟 번의 화재를 겪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1923년엔 관동대지진, 1945년엔 미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었죠. 게다가 1958년 일본 정부가 “매춘금지법”을 발동하면서 결정타를 맞게 됩니다. 전국의 유곽이 다 문을 닫게 되었고 요시와라 역시 폐업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요시와라의 역사가 끝이 났다면 제가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겠죠. 영화 인터스텔라에 그런 말이 나오잖습니까. 요시와라 역시 새로운 살 길을 찾게 되는데 그게 바로 소프랜드였습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