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ome
  2. 일본섹스잡학
  3. 일본 섹스의 성지 요시와라의 역사를 아는 척 좀 해볼까?

일본 섹스의 성지 요시와라의 역사를 아는 척 좀 해볼까?

본격적인 일본유흥의 탐험에 앞서 일본 섹스 산업의 성지, 요시와라라는 곳의 역사부터 잠깐 이야기 해보자. 요시와라는 도쿄 아사쿠사 근처에 있는 소프랜드가 잔뜩 모여 있는 동네 이름이다. 일본 밤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곳은 그 옛날 에도 시대부터 일본 남자들이 성욕을 불태웠던 유명한 유곽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현대 일본 섹스 산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프랜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비누 나라라는 조금은 생뚱맞은 뜻을 가진 소프랜드는 우리나라의 안마시술소와 비슷한 업소다. 안마시술소가 안마를 시술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이 없는 것 처럼 소프랜드도 무슨 빨래방이나 목욕탕쯤으로 상상하는 일본 사람은 없다. 적어도 남자라면 말이다.

1617년, 도쿠가와 막부는 이런 생각을 하게된다. “남자들의 성욕을 풀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안정된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에도의 남녀성비는 완전 미친 상태였거든. 도쿠가와 막부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수도로 정했을 때 그곳은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새로운 수도 건설을 위해서는 엄청난 토목공사가 벌어졌고 엄청난 수의 남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에도로 몰려들게 된다. 그 덕분에 에도의 남녀성비는 7대 1, 아니 심할 때는 10대1까지 벌어진 때도 있었다. 에도 남자 중 열에 아홉은 연애나 섹스 근처에도 못가는 상황.

스웨덴인지 덴마크인지 북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섹스를 못하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장애로 여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모태솔로들에게 사회복지 차원에서 성매매 업소의 쿠폰을 나눠준다고들 하는데 당시의 에도가 딱 그런 사회복지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남자들의 성욕을 제대로 풀어주지 않았다가 어떤 사회적 혼란을 맞게 될지 윗대가리 어르신들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요시와라(吉原)였다.

요시와라는 처음에 니혼바시(日本橋)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1657년 대화재로 홀라당 타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아사쿠사(浅草) 쪽으로 옮겨오면서 “신 요시와라”라는 이름으로 거대 유곽이 만들어졌다.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청량리나 미아리같은 거대 집창촌인 셈인데 그보다는 훨씬 더 크고 세련된 곳이었다. 도쿄에 여행가서 아사쿠사에 가본 사람들은 그곳에 센소지(浅草寺)라는 큰 절이 있고 그 앞에 거대한 상점가가 늘어서 있는 걸 본적이 있을 거다. 그 센소지 뒷쪽에 거대 성매매 단지인 요시와라가 있었다. 성스러움과 또 다른 성스러움이 겹쳐지는 기묘한 구성.

사실 에도 시대의 아사쿠사는 거대한 종합엔터테인먼트 테마 파크같은 곳이었다. 상점가에서 술 마시고  절에 가서 복을 빌고  그다음엔 요시와라에 가서 섹스도 할 수 있으니, 그곳에만 가면 남자들의 기본적 욕구가 원샷으로 해결되는 것이었다. 

요시와라에서 일하는 언냐들을 유녀라고 불렀는데 에도 시대의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단순한 성매매 여성이 아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프랑스의 물랑루즈 캬바레의 매춘부들이 당시 예술가들의 뮤즈였듯이 요시와라의 유녀들 역시 그런 대접을 받았다.

유녀들 중에 인기녀들은 ‘오이란(花魁)’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뭐 거의  슈퍼스타였다고 보면 된다. 얼굴, 몸매, 섹스는 물론 예술·시·춤 등등에 다 능했던 그녀들은 말 그대로 토탈 패키지 엔터테이너였다. 걸그룹으로 치면 센터쯤 되는 존재들이라고나 할까? 그것도 비주얼 담당, 메인 보컬, 매인 댄서가 다 되는.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거창한 머리 장식을 한 오이란이 행진을 하는 모습은 에도의 최고 구경거리 중에 하나였을 정도다. 이런 오이란을 데리고 노는데 들어가는 화대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단순히 돈이 있다고해서 오이란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약전쟁의 광클은 기본이고 적어도 3번은 만나야 그녀의 다리를 벌릴 수 있었다. 일단 처음 얼굴 한번 보는데 5-10냥의 돈이 들어가고 두번째 가서 조금 친해진 후, 옷 한번 벗기는데 50냥이 들어가고 세번째 가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데 100냥의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에도시대 물가로 쌀 150kg가 1냥이었다고 하니 오이란을 지명 삼아 맘대로 데리고 노는 레벨까지 가는데 쌀이 무려 24톤이나 필요했다는 얘기다. 이건 보통 남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어지간한 재력과 권력이 있는 남자가 아니면 감히 넘볼 수 없는 게 오이란의 세계였다.

물론 요시와라에 비싼 오이란만 있었던 건 아니다. 가성비 좋은 중급의 유녀도 있었고 저렴하게 섹스를 할 수 있는 하급 유녀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저렴한 C급 유녀라도 화대는 최소 1냥이었다고 한다. 섹스 한 번 하는데 최소 쌀 150kg가 필요했다는 얘기니 요시와라는 그야말로 하이엔드 유흥이었던 셈. 이렇게 돈이 잘 돌 다 보니 요시와라를 중심으로 가부키나 우키요에 같은 일본 대중문화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지금의 막강한 일본의 서브컬쳐 파워의 근원이 요시와라였던 셈인데 최근 NHK에서 방송하고 있는 <베라보>라는 대하드라마를 보면 이런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요시와라를 배경으로 오이란이나 유녀들의 화보집을 팔아서 큰 돈을 번 남자의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내용인데 그 남자의 이름이 츠타야 쥬자부로(蔦屋重三郎)였다. 츠타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아닌가? 맞다. 일본 시내 곳곳에 있는 서점이자 예전엔 CD, DVD 렌탈로 유명했던 TSUTAYA의 유래가 바로 츠타야 쥬자부.

물론 TSUTAYA가 쥬자부로가 창업한 회사인 건 아니다. 지금의 TSUTAYA는 1983년 오사카에서 창립된 회사니까 쥬자부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신 책과 미디어를 다루는 일을 주업종으로 하는 회사인만큼 에도시대의 출판왕, 미디어왕이었던 츠타야 쥬자부로의 이름을 따서 회사명을 지은 것이다. 실제로 TSUTAYA가 서점으로 성공하고 이후에 미디어 시장도 석권했으니 이름빨 하나는 제대로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잘나가던 요시와라지만 그 번영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단 지겹도록 화재가 많이 났는데 사실 이건 요시와라 뿐만 아니라 에도 전체가 겪었던 문제이기도 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목조 가옥에 엄청난 인구가 모여 살다 보니 걸핏하면 불이 났기 때문이다. 요시와라도 무려  열여덟 번의 화재를 겪었다고 한다. 게다가 1923년엔 관동대지진, 1945년엔 미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타는 일본 정부가 1958년에 발동한 “매춘금지법”이었다. 성매매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니 전국의 유곽들이 다 문을 닫게 되었고 요시와라 역시 폐업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와라의 역사가 그렇게 끝이 났다면 내가 지금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요시와라 역시 새로운 살 길을 찾았다. 그게 바로 소프랜드였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